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자크 루소 (문단 편집) === 유명 음악가로서의 성공 === 그 이후에도 방랑을 지속하던 루소는 [[파리(프랑스)|파리]]에 정착하는데 그 계기는 음악이었다. 1742년, 30살이 된 루소는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했다.[* 악보를 숫자로 표기하는 형식이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경우에는 편할지 몰라도 악기 연주자들 한테는 불편하다고 까였다. 무엇보다 옛날에 똑같은 방법을 먼저 발표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까였다고.]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아카데미 사람들과 많이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그 중 한 명이 또 다른 시골뜨기인 [[드니 디드로]]였다. 훗날 위대한 계몽철학자로 평가받는 디드로는 박식하면서도 열정적이고 격렬하게 대화를 하면서 주변을 휘어잡는 스타일이었고, 루소는 정반대로 대화에 서투르고 부끄러워 입을 달싹도 못했지만, 둘은 곧 절친이 되었다. 비슷한 처지였던 콩디야크, [[달랑베르]]도 함께 친해져서 4명은 매주 술자리를 가지며 토론을 펼쳤다. 그들은 유력 가문의 부인이 주최하는 [[살롱]]에도 드나들면서 지식과 인맥을 점차 넓혀나갔다. 1743년에는 한 귀부인의 도움을 받아,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채용되어 이탈리아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루소는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음악과 문화를 충분히 만끽했지만, 프랑스 대사는 지속적으로 월급을 체납했고 이 때문에 11개월 만에 비서직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루소는 친구들과 부유한 부인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였다. 그리고 이 시절부터 루소는 호텔의 세탁부였던 테레즈 르바쇠르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했다. 루소와 테레즈 르바쇠르의 관계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인데, 루소는 그녀를 단지 가정부나 성적 보충물[* 루소는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는 상대나 행위를 '보충물'로 보았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277.) ]로 취급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최고위급 귀족과의 단 둘이 하는 식사에 반려자인 그녀가 한자리를 차지해야 된다고 고집하여, 미천한 가정부와 대등하게 식사를 한다는 것이 분했던 그 귀족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소중한 반려자로 대접하기도 했다. 안그래도 복잡한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든건 루소와 테레즈 르바쇠르 사이에 태어난 5명의 아이들을 모두 다 고아원에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가 자식을 버린 이유는 아버지인 자신이 돈이 없는데 키워봐야 삐뚤어질 것이라는, 핑계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루소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을 때 뒤늦게 아이들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기록이 모두 없어져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루소는 그녀와 남은 생애를 함께 했지만 굳이 다른 여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거부하진 않았고, 테레즈 르바쇠르도 간혹 찾아오는 다른 남자들과의 애정 관계를 즐겼다.[* 테레즈가 지혜의 비결을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무모한 젊은이 보즈웰에게 가르쳐줄 것이 많았고, 크랜스턴이 엄격하게 지적하듯이 그의 엄마뻘이 될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두 사람은 일정이 지체되어 배를 기다리면서 일주일 넘게 함께 있었는데, 보즈웰은 일기에서 그들이 도버에 도착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진술한다. "어제 아침 아주 일찍 침대에 가서 한 번 했다. 모두 합해서 열세 번이다." (중략)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후에 테레즈가 루소에게 간통 사실을 말했다는 것인데, 훨씬 전에 역마차 안에서 고프쿠르를 다루었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자신이 정숙하게 유혹에 저항한 것으로 꾸몄을 것이 뻔하다. 보즈웰은 그들의 짧은 정사를 결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약속을 지켰다. (리오 담로시 저, 이용철 역,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서울, 교양인, 2011, p.582~583)] 그러는 와중에도 음악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서 1751년엔 디드로가 편집을 맡은 《[[백과전서파|백과전서]]》에 음악 관련 부문을 집필하였고, 1년 뒤엔 단막극 오페라 각본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를 완성했다. 이 짧은 오페라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심지어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도 그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루소는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무대공포증이 있었던 루소는 긴장을 이기지 못했고, 관계자에게 아무런 설명없이 알현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관계자와 주변 친구들은 이를 보고 기겁했지만 다행히 별다른 불이익은 없었다. 되리어 《마을의 점쟁이》는 점점 유명해졌고, 루소는 이제 어엿한 한 명의 음악가로서 프랑스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외에도 그의 작품들 중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개신교 [[찬송가]]에 《주여 복을 비옵나니(구하노니)》[[https://www.youtube.com/watch?v=qAMNcDvlMsc|#]], 《예수님은 누구신가》[[https://www.youtube.com/watch?v=5w9_Jz1wgHo|#]][* 나중에 Church Praise Revolution이 이 곡을 바탕으로 [[오진 예수]]를 만들었다.] 등이 있다.[*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동요)|주먹 쥐고 손을 펴서]]로 유명한 선율도 《마을의 점쟁이》 8장에 나오는 선율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8wKfheK-sHg|#]]] [youtube(mB08gwA8oYc)] 루소는 당시 프랑스에서 논란이 되었던 부퐁논쟁(Querelle des Bouffons)에 뛰어들기도 했다. 부퐁 논쟁은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페르골레시의 오페라인 《마님이 된 하녀》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의 장점을 둘러싸고 벌어진 활발한 논쟁을 일컫는다. 프랑스 음악을 대표했던 [[장필리프 라모|라모]]는 수학적으로 계산된 '화음'이 음악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이탈리아 음악을 옹호하는 루소는 화음이 아닌 단순하고 반복되는 '선율(멜로디)'이 음악이 가진 힘의 원천이며, 음악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더 호소해야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 15년 뒤, 1768년에 쓴 《음악사전 Dictionnaire de musique》에서도 루소는 프랑스 풍의 [[바로크 음악]]을 '화성적으로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하고, 노래는 굳어 있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음정도 잡기 어렵고 움직임은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평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